[베니스의 요일 번외] 이틀밤 린츠
베니스의 요일 번외
이틀밤 린츠
2018/10/06-07
유럽 여행 카테고리로 뺄까 하다가, 딱히 여행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블로그용 문체보다는 캐주얼하게 일기처럼 쓰고 싶어서 이곳 카테고리에 번외로 써본다.
6일 밤 8시, 잘츠부르크에서 약 2시간을 달려 이곳 린츠에 도착했다. 24시간동안 유효한 트램 티켓을 사서 친구가 지내는 기숙사로 향했다. 옥토버페스트 기간을 맞이하여 불꽃축제를 한다기에, 기숙사에 짐을 내려놓고 금방 나왔다.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서 중앙역에서 기숙사까지 30분, 기숙사에서 시내까지 15분 정도면 오고갈 수 있었다. 즉 기숙사-15분-도시 중심-15분-중앙역 구조의 도시.
아쉽게도 -특별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꽃놀이는 끝끝내 시작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웰컴 파티가 굿바이 파티로 바뀐 것이 아닐까? 그날 처음 만났으며 앞으로 만날 일 없는 친구의 친구1에게 말했다. 빠하하 웃으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길래 머릿속에서 Forse si(Perhaps, in Italian)가 생각나서 퍽 이탈리아어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떠나는 날 밤에도 불꽃놀이는 없었다.
알콜농도 약 2퍼센트의 레몬맥주캔을 들고다니면서 린츠의 옥토버페스트를 뽈뽈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엄청 큰 놀이기구도 많고 작지만 맥주 천막도 있고 총쏘면 시덥잖은 인형을 주는 유흥거리도 있었다. 놀이기구 타면 토할 것 같아서 안 탔고 총은 한 번 쏴봤다. 귀여운 싸구려 인형을 얻었는데 그게 뭐라고 신이 났다.
대학가이기도 해서 그런지, 친구가 얼토당토 않은 장소에서조차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갑게 인사나누는 장면을 보며 신촌이 생각나기도 했다. 다행히도 신촌이 별로 그립지는 않았으나, 속없이 잘 지냈니 다음에 술한번 먹자 따위의 인사를 하고 30초만에 헤어지는 게 잠깐 생각나기는 했다.
도나우 강가 벤치에 앉아 친구의 친구1인 캐나다인에게 -나는 캐나다에서 카약을 타고싶어-라고 했더니 -캐나다 어느 지역에는 헬기에 카약을 싣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빙하가 녹은 물에서 카약을 타는 게 있다-고 알려줬다. 외계인에게 전보를 써야한다면, 인류는 물가에 모여사는 걸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보스나'라는 오스트리아식 핫도그를 사먹어보았다. 정말 맛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로 수입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이탈리아에 평생 살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한국에서 먹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기에 한국으로 수입-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모쪼록 맛좋은 빵 사이에 그렇게 짜지 않은 맛좋은 소시지와 ('짜다'는 형용사를 떠올리다가 salato? salty? 아 짜다, 이렇게 됐다) 어쩐지 달짝지근한 토마토소스 맛도 났고 무엇보다 양파가 많이 들어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좀체 양파를 먹지 않아서 이거 서브웨이라도 가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차에 보스나를 먹은 것이다.
불꽃축제를 보면서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며 맥주나 한 잔 걸치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되었기에, 친구와 친구의친구1과 함께 도나우강을 건너서 있는 어떤 술집에 들어왔다. Chelsea라는 이름의 펍이었는데, 껠세아라고 이탈리아식으로 읽을 뻔 했기에 나의 영특한 두뇌가 기특했다.
내가 좋아했던 지금은 거의 해산 지경에 이른 밴드 봄베이바이시클클럽이 생각나서, 봄베이 드라이 진을 주시오 했다. 영어를 엄청 잘하는 점원이 핑크 진을 권유하기에 그럼 그걸로 주씨오 했다.
어차피 영원히 볼 일 없으며 서로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는 인간1과 나눈 오랜만의 대화였다. 이를테면 사진은 결제를 기다리면서 (여기서는 '결제 해주세요'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결제를 하고싶다는 듯이 직원을 열렬히 쳐다보면 된다고 했다.) -우리 겜블링하는 것처럼 사진 찍자-고 하며 서로가 내야할 돈을 탁자위에 널브러뜨렸다. 그런 식의 말도 안되는 시덥잖은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핑크진이 눈물나게 맛있었기에 (그정도는 아니었지만 마땅한 수식어가 생각이 안남) 핑크진 그친구 얼굴좀 볼 수 있겠냐 요청하였더니 친절히도 원본을 가져다주었다. 새로나온 친구이고 마트 곳곳에 판매 중이라고 일러주었는데, 린츠의 마트는 주말에는 모두 닫고 이탈리아 마트에는 팔지 않아서 아직도 슬퍼하는 중이다.
이곳의 기준으로는 썩 늦지 않은 시간에 기숙사로 돌아가서 전기장판 위에서 잠을 잤다. 북쪽은 춥다 하여 패딩이며 코트며 입고 나왔는데 별로 춥지 않아서 난감키도 하였으나, 전기장판에서 따수웁게 자는 것은 여름에도 흔히 행해지는 일이기에 기분 좋은 잠을 잘 잤다.
다음날 아침에는 친구가 기숙사에 있는 재료로 김치찌개를 끓여주었다. 미니 밥솥도 있어서 밥도 먹었다. 아침에 커피 한잔과 빵과 쿠키를 먹어와서인지 이거 너무 해비한 거 아닌가 했는데 시계를 보니 11시여서 괜찮아졌다. 무엇보다 눈물나게 맛있었다. 마늘을 썰고 있으면 나를 어지간히 박해하는 플랫메이트들과 지내다 이곳에서 마음껏 마늘을 써는 모습에 감동받기도 했다. 한식이 대단히 그립지는 않지만, 이렇게 가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한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한국에 대해서 쿨하고 싶은데 잘 안돼서 머쓱했다.
밥을 먹고 있는데 다른 한국인이 들어왔다. 나를 보자마자 '안녕하세요 몰골이 이래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싶지 않아졌다. 나는 타인을 쉽게 Judge하는 사람이 아닌데,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몰골이 이래서 죄송'따위의 말을 덧붙이게되는 현상은 한국인 모두가 반성해야할 부분이다. 반성을 요구하면 한국의 뿌리깊은 반지성주의가 나를 박해할테지만 어쩌겠는가. 천재로 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일요일이면 축축하고 한산하게 가라앉는 도시의 분위기 덕분인지 (무진기행이 대단히 과대평가된 소설이라고 생각키는 하나, 어쨌든 그 작가분에게 안개는 무진의 명물이 아니라 린츠의 명물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게으른 오후를 보내고 느즈막히 시내 구경에 나섰다. 사실 밥을 먹고 나서 전기장판 위에서 한두시간 낮잠을 잤다. 아마 세시간이었을텐데 그냥 한두시간이라고 말하고싶다.
이때는 마냥 신나서 뽈뽈 돌아다녔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소설을 쓰게 된다면 린츠에 머무르며 글을 대충 끼작대고싶다. 물론 열심히 써야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모쪼록 대단히 신나지도 대단히 번잡하지도 대단히 한가하지도 않은 도시의 강가에 앉아 쫑쫑 뛰어다니는 사람들 구경을 하면서. 흑사병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다리를 부쉈다는 옛날 남의 얘기도 몇 번 생각해보면서.
지금이야 이 새벽에 괜히 축축한 기분이 되어서 안개낀 일기를 쓰고있지만 이때는 되게 신나있었다. 일요일에는 1/3만 문을 여는 마트에 들러 딸기가 잔뜩 올라간 치즈케이크랑, 작은 쿠키가 뚜껑에 올려진 인스턴트 커피를 사왔다. 어쩐지 로컬들만 아는 것으로 추정되는 도나우강 전망 스팟에 올랐다. -인류는 강가에 모여사는 것을 선호합니다. 자연다큐스러운 나래이션을 꼭 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한참을 걷기도 하고 트램을 타기도 해서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이곳에는 밤이면 밤마다 술자리나 파티가 있다고 해서, 파티를 좋아하는 Freaking Introvert 박요일씨도 빠지지 않고 들렀다. 밤기차를 타야하는 데 별 생각 없이 레드불을 너무 많이 마셔버리기도 했다. 어차피 다시 볼 거 아니잖아-식으로 서로 이름도 잘 묻지 않는 분위기가 좋았다. My name is Yoil :) (whatever)식이었는데, 그것이 나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베네치아로 돌아가는 밤기차에서 많은 생각이 오고가기도 했으나 몸은 졸린데 정신은 졸리지 않아서 어떤 시점에서는 정신을 비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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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학생도 여행자도 아닌 방문객의 입장에서 도시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나는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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