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멀리서 온 편지
명왕성 등대지기 디제이 이끼와 함께하는 일곱시 데이트. 여러분이 계신 행성엔 낮이 찾아왔을까요? 아니면 아직 어스름을 헤메고 계신가요? 아니면 낮도 밤도 없는 곳에 계신지요? 태양계의 끝자락에서 간신히 낮과 밤을 얘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외로운 별 명왕성에서 오늘도- 외로운 이끼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왔는데요, 무려 이메일로 발송주셨습니다. 와우. 요란한 알림이 떠서 뭔일 났나 했는데 무려 이메일 수신 알림이었어요.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35개월만에 도착했네요. 내용은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이메일이란 녀석이 아무래도 특별하니까요, 오늘은 요 사연 읽어보겠습니다. 닉네임 134340님의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끼님? 저는 지구에 살고있는 134340입니다. (오해는 말아주세요, 부모님이 지구 음향 보존 기록자셔서 지구에 남아있는 것이랍니다.)
얼마 전에 애인과 헤어졌어요. 너무 뻔한 소재라 안읽어 주시려나요? 안 읽어주신다 해도 저는 지금 이 얘기를 꼭 지구 밖의 누군가 들어줬음 좋겠네요.
짧게 만난 편은 아닌데요. 우주끝 프로젝트에 참가해야한다더니 돌연 통신을 뚝 끊었어요. 미안하다 내가 나쁘다 어쩌다 좋은 사람인 척 하는 소리는 빼먹지도 않더군요. 이 노인네 뿐인 행성에서 운명적으로 또래를 만나 엉겁결에 사랑에 빠진 나머지 정말로 운명같은 걸 믿었었나봐요. 몰랐는데 꽤나 마음 붙이고 의지하고 그랬었나봐요. 참내 이렇게 떠날거면 달 뒤편에 별장을 짓고 살자 어쩌구 저쩌구같은 멘트는 왜 쳐댄거래요? 더 열받는 건 자꾸 이메일을 쳐 보낸다는 거에요. 지가 차놓고 너무 일방적이죠.
이 구닥다리 메일이 언제 도착할는지 그때도 이별 후유증을 앓고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일단은 지금은 좀 쓸쓸하네요. 보고싶다는 생각하기 싫은데 보고싶기도 해요. 종종 공연한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여전히 어쩔 줄 모르겠네요. 외로운 이끼님, 잘 지내시죠?
아아 여기까지네요. 네, 저는 잘 지낸답니다.
인류가 온 은하계를 헤집고다니는 지금까지도 사랑은 인류가 정복 못한 유일한 개념이지요. 차라리 양자역학이나 로켓 사이언스는 쉬웠어요. 올드팝 아티스트 Twice는 Love ain't a science, don't need no license 라고 노래한 바 있지요. 차라리 사랑이 과학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라성같은 천재가 나타나 사랑의 비밀을 풀어서 공식을 만들어버리는 거에요. 사랑으로부터의 기적적인 해방! 인류가 지구를 떠났던 것처럼 말예요.
아쉽지만 이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 일 없겠지요. 무엇보다 사랑은- 답이 없어서 재밌으니까요.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없나요? 우리가 사랑했던 과거가 있는 우주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다시 사랑하고 있을까? 그런 우주가 정말로 이 세상에 있었던 걸까? 추억- 이라기보다는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향수와 차라리 가까운 느낌이에요. 누군가의 말인데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에게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너무나 그리워할 수도 있다. 익숙한 땅보다 더 향수를 느낄지도 모른다'고. 물리적 공간에 느끼는 향수를 말한 거겠지만,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사랑이 생각나요. 내가 그리워하는 건 애초에 거기 있었던 적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
아프지 않은 미래로 훌쩍 떠나는 방법은 확실히 없어요. 아프고 아픔에 무뎌지고 또 그걸 이겨나가는 힘든 하루들이 쌓이지 않으면 그런 미래는 생기지 않으니까요. 시간여행을 한다해도 지금 내가 해낸 게 없으면 원하는 미래에는 갈 수 없잖아요. 결국엔- 시간이 쌓이면 약이 된다는 말 밖엔 할 수가 없네요. 힘든 날들을 거친다면 시나브로 평온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때로는 적당한 누군가와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부러워하게 될지도 몰라요. 사랑은 계속 떠나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계속 만들어야해요. 공연한 외로움이 찾아오더라도, 그 외로움까지 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조금은 꿈결같은 이야기지만, 미래의 우리는 아끼는 누군가와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요. 좋은 냄새가 나는 침구에 몸을 파묻은 것처럼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 통신이 언제 지구까지 가서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134340님은 아직 이별 후유증을 겪고계신가요? 잘 지내시죠? 왠지 잘 지내고 계실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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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9월달에 H의 생일 선물로 주고싶었는데 이제야 써서 올리는 글. 조금 많이 늦긴 했어도 우리 모두에게 다사다난했던 2021이 떠나기 전에, 생일을 축하하며!
ps. 2016년도에 선물받았던 문장을 윤색하여..
It is entirely possible to be homesick for a place you're never been to.
Perhaps more homesick than for familiar ground.
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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