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인스타그램을 로그아웃했더니
심심하다.
핸드폰을 쥐고있는데도 너무 너무 심심하다.
게임은 일일 할당량이 있다. 어느정도 붙잡고 있으면 징하게 싫증난다. 네이버 뉴스도 좀 들여다본다. 지긋지긋한 얘기들 뿐이라 그마저도 금방 끈다. 웃기는 글 모아놓은 게시판에 들락거려본다. 몇개 보다보면 이미 다 본 얘기들이다.
왜 이렇게 핸드폰에 재밌는 게 없지? 짜증이 나서 외친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인스타그램 로그아웃을 한 게 원인이었다.
인스타그램을 좀 적게 하고싶었다. 비활성화나 탈퇴를 할 정도로 안하고 싶은 건 아니고, 습관의 고리를 끊고싶었다. 배고프면 뭔가를 먹고싶다고 느끼는 것처럼 심심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인스타에 들어갔었는데 그게 문득 싫어졌다. 로그아웃을 하니, 앱을 클릭하고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게 없어 도로 나오게 된다. 들어가서 하는 일이래봐야 로그인 해가면서까지 봐야할 중요한 정보도 아니니 굳이 로그인 하지 않게 된다. 가끔 메일함 확인하듯이 들어가게 된다.
단순히 '인스타 적게 할래용😍 #디지털디톡스'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누른 로그아웃이 이렇게 많은 생각거리를 줄 줄은 몰랐다. 얼마나 무방비하게 데이터를 얻고있었는지, 인스타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시작되는 불필요한 인터넷 서핑이나 약속이 얼마나 많았는지,인스타가 내 생활 패턴과 기분에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한 일은 아니다.
너무 심심한 나머지
치과 대기실에서는 종이신문이나 잡지를 뒤적거리게 된다. 퇴근하고는 집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 고민하며 줄자를 들고 여기저기 길이를 재본다. 카페에서는 게임하다가 뉴스보다가 웃기는게시판 보다가 스도쿠를 한다. 자기 전에는 뭔가를 읽거나 쓴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인스타를 켜서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재밌는 일이 벌어졌나 팔로업하는 시간도 이제는 없다.
일전에 친구와 '취미가 점점 핸드폰 하기로 수렴하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의 경우 '인스타 하기'정도의 취미를 가졌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인스타 들어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쇼핑하고, 웃기는 영상 보고- 인터넷에서 이거 좀 재밌다 하는 활동은 인스타에서 다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취미가 인스타 내지는 핸드폰에 수렴하는 현상에 저항하니 너무너무 심심하고, 너무너무 심심하니 다른 재밌는 일을 찾게 된다. 이 글도 심심해서 썼다.
ps.
IT 서비스 기획을 하는 사람으로서 모순적인 마음이 항상 있는데, 유저들의 리텐션을 끌어올리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체류시간 지표가 오르면 기분이 좋은 한편 착잡하다. 덕분에 우리 서비스의 미래야 창창하지만, 유저의 미래는 캄캄해지고 있다는 뜻같이 느껴진다 (물론 어떤 목적으로 서비스를 사용하냐에 따라 창창하신 분도 많이 계실 거지만). 다들 디지털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물리법칙이 작용하는 세상에서 더 많이 활동했으면 좋겠다. 디지털 세상은 언제나 보조도구에 지나지 않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미래 사회에서는 양극화의 양상이 물리공간-메타버스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위에 언급한 '취미가 점점 핸드폰하기로 수렴하는 현상'이 양극화의 초기 형태라고도 생각한다.
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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