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관습적 사고를 깨는 최근의 물건들
1. 머리끈
'머리끈'이라는 녀석이 보편적으로 상실의 대상인데, 노란 고무줄을 머리끈이라고 부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머리끈이 없어지기는 커녕 늘어나기만 한다! 올리브영에서 산 까만 머리끈 10개가 시나브로 시공간의 틈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려 상심하던 차에, 작은 발상의 전환이 내게 온전한 충만함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머리끈은 상실의 대상에서 증식의 대상으로, 기적적인 탈바꿈을 한 것이다. 머리끈으로서의 단점은 딱 하나 뿐이다. 가끔 운 나쁘면 머리털이 잔뜩 휘말려서 아프다는 것 정도.
2. 감자칼
아니, 이럴수가 있나? 친구에게 선물받은 감자칼을 무에 갖다대는 순간 육성으로 내뱉은 문장이다. 아니, 삶은 달걀의 얇은 껍질층이 절묘하게 벗겨져 나가는 것처럼, 감자칼이 너무 매끄럽게 무의 표면을 훑어가며 껍질을 벗겨나가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있나? 분명 내 머릿 속에 있는 감자칼은 채소를 쥐고 깎다가 손바닥이나 안깎으면 다행인 주방기기였는데?
친구가 생일 선물 뭘 갖고싶냐기에, 아이맥이 갖고 싶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니 내게 정말 필요하고 그치만 친구에게 부담은 되지 않는 물건을 생각하다 떠올린 물건이 감자칼이었다. 나의 세계에선 '고급 감자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가 '유명한 브랜드'라며 감자칼을 보내왔을 때까지는 솔직히 별 생각 없었다. 아니, 고작 감자칼이잖아? 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친구가 내게 준 것은 고급 감자칼뿐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그것이 고작 감자칼이라 하더라도- 손쉽게 속단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었다.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가 아니면 안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나의 굳어버린 사고를 쪼개준 머리끈과 감자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Special Thanks to HY)
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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