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람 분당일기 (4) 사실은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 분당 시티
아무리 시덥잖은 동네라도 여행 다니는 게 그 자체로 재미난 이유는 두 가지다.
(1) 발견하는 재미: 묘하게 다른 건물의 높이와 도로의 넓이가 풍기는 동네의 분위기, 동네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 기상천외한 골목과 간판, 어떤 가게가 많은지에 따라 어떤 동네일지를 가늠할 수 있는... 이를테면 골목마다 꽃집이 있으면 이 동네 좀 여유가 있는 동네군- 하는 재미
(2)세렌디피티: 기대치 않은 곳에서 그럴듯한 카페를 발견한다거나, 꽤 괜찮은 스몰토크를 스무마디 정도 주고받을 수 있는 낯선 사람을 만난다거나 등등.
내가 서울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꼭 어디 멀리 여행을 갈 필요도 없이, 당장 아무 버스나 잡아 타고 두세정거장만 가도 생경한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 와보는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경험들도 너무 좋다. 어 처음 오는 동네인거 같은데 왜이렇게 익숙하지 - 아 예전에 차타고 자주 지나가던 길이구나 - 같은 거.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동네에서도 조금만 두리번 거리면 처음 가보는 식당 가게 골목이 보인다. 흑석동에 10년도 넘게 살았는데 아직도 흑석동에는 내가 모르는 길들 가게들 식당들이 많이 남아있다. 서대문구 너무 익숙한 동네라고 생각했지만 홍은동 즈음만 가도 '여기 폭포가 있었어?' 하는 충격이 있는 도시 서울...
낯선 동네를 돌아다니며 설레는 낯선 감각들을 수집하는 것은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렇고 그런 평일을 보낸 뒤 끝내주게 평화롭고 시끌벅적하고 익숙하고 낯선 동네들을 돌아디니는 것. 등산을 가든 영화를 보러 가든 아무 목적 없이 걸어다니든 한껏 멋있는 카페에 가서 인테리어를 샅샅이 훑어보며 커피가 맛있네 맛없네 하든, 도시가 주는 정서적인 에너지를 흡수하고 체력은 방전시킨 채 집에 돌아와 끝내주게 푹 자는 것... 경기도에서의 주말은 이게 안돼서, 이곳에서의 삶이 사실은 아직 적응이 안된다. 물론 '가면 되잖아?'의 마음가짐으로는 못갈 것도 없지만, 어딜 가나 왕복 3시간 이상이 걸리는 마법에 빠진 시티 분당에서는 그게 잘 안된다.
물론 역병이 창궐하는 이 마당에 어딜 옛날만큼 많이 쏘다니겠냐만은,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아직 분당이라는 동네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딜 가도 딱 기대한 만큼의 풍경을 향유할 수 있는 동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정자동에 살면서 미금-정자-수내-서현 정도 다녀봤는데, 일단 수내와 서현은 아직도 전혀 구분이 안된다.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바이브를 풍기는 두 역을 보고있자면 '도시'라는 거대한 개념을 이렇게 정형화할 수 있는 현대 문명의 힘이 느껴진다. 해서, 버스를 타면 한두 정거장 정도는 일찍 내리거나 늦게 내리기 일쑤다... 그리 오래 살지는 않은 터라 (반년 정도 살았으니까) 바깥 풍경으로는 여기가 어디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역마다 백화점이 있고 경기도식 상가 건물에 이런 저런 가게들이 있고...
정자동에서 나름 멋부린다고 입은 옷차림 그대로 서울로 가면 -아차 나 지금 너무 평범하잖아! 하는 생각이 들며, 계획도시 분당의 정형화된 직장인이 되어버리고 있는 건가 하는 위기감이 든다.
구구절절 온갖 미사여구를 써가며 미괄식의 글을 썼지만. 사실은 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나는 서울이 너무 좋다. (2) 분당의 라이프스타일과 나는 맞지 않는다. 내년에는 한남동-보광동 쪽으로 집을 다시 구하려고 한다. 위 사진은 러블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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