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부는 사랑하는 시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렸을 때 살던 아파트 현관이 생각난다. 엄마가 퇴근하면서 몰고 들어오던 겨울냄새. 찬바람을 몸에 가득 안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온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 붕어빵을 썩 좋아하지도 않지만 괜히 하나 사먹고 싶어지는 기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월 달에는 항상 좋은 일들이 많았다. 재작년에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불러서 내가 태어난지 팔천일 되는 날을 기념했다. 반만 켜진 조명과 친구가 만들어줬던 노래, 밤 늦게까지 시덥잖은 농담과 웃음으로 채워진 홍대의 에어비앤비, 체크아웃 시간 쯤에 엉거주춤 잠에서 깨 반쯤은 잠든 상태로 집에 가는 버스 안.
작년 시월에는 분홍색 베네치아 속을 매일같이 걸어다녔다. 꽤 오래 키웠던 바질과 한가한 메스트레의 주택가, 노을을 보기 위해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서 베네치아 섬으로 가던 트램 안 -그 트램 안에서는 내가 가장 낯선 사람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차고에서 주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공원을 돌아다니곤 했다. 그때 매일같이 입었던 연청색 바지는 베네치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 유럽 어딘가에 버리고 왔다. 베네치아가 그리워질 때마다 사진첩을 뒤적거리면서, 아 그거 버리고 왔구나 - 하면서 옛 물건들에게 안부를 괜히 한번 물어본다.
올해 시월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면서 보내고 있다. 자신의 기호와 선호를 빈틈없이 알고있는 사람들. 나는 테크하우스를 주로 듣지만 노래 틀 때는 재즈 힙합을 틀어 … 라든지, 커피는 산미가 강한게 좋아... 라든지. 나는 유튜브 들어가면 고양이밖에 없어... 라든지.
공간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는 노래 속에서,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무렇게나 마음 가는대로 춤을 추는 사람들과 조명빛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주저없이 춤추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부러워했던 것 같다. 나는 춤 추는 것도 싫고, 너무 완전히 몰입하게 돼버리는 것도 싫더라고. 영화에서 처럼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서 손을 들여다보고, 나 아직 여기 있구나 안심하는 장면. 다행히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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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는 못한 얘기지만, 구월달에는 한달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놀랍게도 네이버 정직원 합격 소식을 받은 이후에 말이다. 이제 나는 뭘 하면 되지? 뭘 해야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지? 이렇게까지 순조로워도 되나? 그런 생각에 너무 몰두해 있었다. 인생에서 최초로 '당장 눈 앞의 목표 없고 굳이 없어도 됨' 상황에 봉착하자 적잖히 당황했던 것 같다. 그냥 마음 편히 미뤄뒀던 하고싶었던 일들을 하면 되는 거였는데.
누구에게나 고민은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진심어린 위로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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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기억은 무방비 상태에도 문득 찾아와 나를 괴롭히지만, 좋은 기억은 신중하게 기억해내야한다. 더 자주 좋은 기억을 기억해내기 위해 열심히 쓰고 찍고 그려둬야한다. 몽상가가 되기 보다는 과거의 소중함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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