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양체질 식단에 대한 깊은 빡침
금양체질 식단에 대한 깊은 빡침
내가 여름만 되면 심히 수척해지고 골골거려서 엄마가 한의원을 보내줬다.
계절에 따라 컨디션이 와리가리 하는 것은 양약으로는 해결될 것이 아니요 기와 혈의 흐름을 알고 근원을 해결해야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체질의학 하는 걸로 유명한 한의원이라는데, 시험공부며 보고서며 장사며 할 것도 많은데 병원에 성실히도 다녔다.
병원 앞에 능소화가 폈다! 올해 첫 능소화
우리 학교 외솔관 앞에도 능소화 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겨울하고 봄에는 무슨 ‘죽은 나무를 왜 안 치우지’ 싶게 을씨년스럽게 뻐썩 말라있다가도, 날이 슬슬 더워지면 잎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정신을 차려보면 이렇게 잎과 꽃이 한가득 펴있다.
능멸할 능에 하늘 소, 꽃이 하늘을 치켜보고 피기 때문에 하늘을 능멸하는 꽃이라 불린다고 한다. 박완서의 소설에 능소화가 담장너머로 핀 집 묘사가 나온 적 있는데, 거기서 능소화라는 이름을 배웠다.
능소화가 처음 핀 이 날 나는 금양체질 선고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이 한참 내 손목을 쭈물거리더니
‘맥이 확실하게 잡히는 건 아니지만요’ 하더니
‘현재까지 보건대 금양체질인 것 같습니다’ 하더니
‘일단 고기 드시지 마시구요’ 하시기에
내가 깜짝 놀라 ‘전부요?’ 했더니
‘네’ 라고 하시기에
‘고기 우린 국물도요?’ 했더니
사골같은 것도 좋지 않다 하셨다.
그리고는 커피도 밀가루도 설탕도 자극적인 음식도 모두 지양하기를 권고하셨고 나는 묵묵히 저 표를 읽다가 ‘그래도 초콜릿은 먹어도 되네요’라고 했더니 ‘우유가 잘 안받으니까 밀크초콜렛은 드시지 마시고 설탕 적게 들어간 카카오 고함량 초콜릿 드시거나, 카카오파우더 사서 포도당 가루 섞어드세요’라고 했다.
이날 나는 진료가 끝나고 마라탕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너무 상심이 큰 나머지 입맛을 잃어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저 표를 보여줬더니 '절에서 살아야겠넼ㅋㅋㅋ'하기에 '엄마 근데 맨 아랫줄 봐바 숲속주거 해로워서 절에서도 못 살아 ㅋㅋㅋ' 했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상당히 배가고프다는 사실을 발견,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웹서핑을 했다.
‘금양체질 식단’ 따위의 검색어를 활용하였고 결과는 통탄스러웠다. 이 체질식을 정말 철저히 지키려면 웬만한 스님보다도 더 탈속적인 식사를 해야한다. 마늘과 고추가루도 안맞기 때문에 백김치를 먹는 게 좋으며, 쌀밥과 함께 배추된장국이나 간이 거의 안 되다시피 한 초록채소 따위를 주로 섭취한다.
5252, 이봐, 스님도 빨간김치는 먹는다고!
베지테리안이라고 부르기도 좀 머쓱한 것이, 고기를 제외하고도 애초에 ‘이 음식은 먹어도 좋습니다’ 라고 허락받은 음식 종류가 정말 없다. 심지어 사과도 안 받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래도 그나마 안심했던 점은 바다물고기는 먹어도 된다. (그렇다, 이와중에 민물고기는 썩 안 받는다고 한다)
내가 초밥을 먹으러 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슬프게도 밀가루 음식인 우동이 보조반찬으로 나와버렸다. 밀가루과 고기를 피해 초밥을 먹으러 왔는데 말이다. 무튼 음식물 쓰레기를 발생시키고 싶지 않기에 이것도 먹긴 먹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점심을 사먹어보았다.
체질식을 철저히 지킬 생각은 없지만, 다음 진료 전까지만이라도 체질식을 해보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래도 이유가 있어 체질식을 시키는 것일테니, 며칠 시도해보고 좋으면 게속 하고 아니면 말기 위함이다.
손바닥만한 파인애플, 바나나 두개, 요플레를 샀고 거진 오천원 가량을 지출했다. 요플레는 잘 안 받는 음식이지만 이것 말고는 도저히 먹을 게 없었다.
무튼 다 먹었는데도 포만감이 안 드는 데다 배가 금방 꺼져서 4시쯤에 김밥 한 줄 먹고 7시에 저녁 또 먹었다.
참치김밥을 시켰는데 안에 햄이랑 오뎅이 들어있기에 그거 일일히 빼가면서 먹었다. 김밥에 꽤 큰 구멍이 생겨서 신기한 나머지 이런 귀여운 사진을 찍어버렸다. 매우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인상적이다.
먹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음식 중 유일하게 맛있는 파인애플…
손바닥만한 한주먹거리가 이천원…
금양체질식 하려면 부자여야한다.
김밥을 먹고도 배가 안 불러서 7시쯤 학교 지하에 있는 샐러디에서 곡물샐러드 먹었다. 하여간 식비 개박살 나는 식단이다.
나는 원래 식사에 대한 의욕과 열망이 크지 않아서 식사를 굉장히 대충 떼우는 편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밥 먹기가 싫다. 맛있는 거 먹는 건 좋은데, 그냥 '배가 고프면 음식을 섭취해야하는 것' 자체가 성가시다. 하루 계획을 세울 때 점심먹는 시간과 저녁먹는 시간을 모두 고려해야한다는 게 아주 큰 비효율로 느껴진다.
금양체질식을 시작하니 놀랍게도 음식에 대한 열망이 생기고야 말았다. 이를테면 '끝내주게 맛있는 게 먹고싶다'는 욕망이 새로 생겼달까. 먹을 수 있을 때는 별 생각 안했는데, 먹을 수 없다고 하니까 그동안 나를 지나갔던 많은 음식들이 생각나면서 그 중에서 제일 맛있는 걸 먹고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금양체질식에서 제일 빡치는 건 먹을 게 오지게 없기도 없고 대체로 맛도 없는 주제에 비싸기까지 하면서 포만감도 안든다는 것이다. 가성비가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 벌크업해서 초강력 인간이 되고싶은데 체질 맞춰 먹다가는 벌크업은 고사하고 살이나 안빠지게 조심해야한다.
근데 더빡치는 건 한 3일 정도 신경써서 끼니를 챙기니까 (커피도 끊었고, 고기와 밀가루와 설탕은 피치못할 경우 극소량만 섭취하기) 몸이 좋아졌다. 밥 먹고 나서 졸린 것도 정말 많이 줄어들었고, 안색도 좋아졌다. 그리고 진짜 신기한 것이 왼쪽 눈 시뻘개지는 게 많이 줄었다.
진퇴양난이다. 맛있는 걸 먹고 재미난 인생을 살거냐, 맛없는 것만 먹고 건강한 삶을 살거냐...
도저히 못참겠어서 고심 끝에 쿠키를 하나 샀는데, 맛없었다. 불쉿!
이것이 리스크 테이커의 숙명이다.
외식을 하게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초밥이랑 쌀국수 정도. 그래서 친구들이랑 쌀국수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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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한의학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오고 있다. 60살 때쯤 수능 다시봐서 한의대를 가든지, 아니면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든지 하고싶었다.
근데 이번 금양체질 사건으로 인해 짝사랑이 다소 식었다. 나는 과연... 환자에게 '당신은 금양체질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지 트레이닝 결과 입이 잘 안 떨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모쪼록 며칠만 더 해보고 결정하려고 한다. 미안해요 의사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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