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7일 신촌 홍대 합정
요며칠 날씨가 계속 좋다.
여기가 정녕 남한이 맞는가 의심스러워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나의 오랜 습성 중 하나는 날씨가 좋으면 어디든 쏘다닌다는 점이다.
베네치아에서는 거의 모든 날이 좋았기 때문인지 거길 생각할 때마다 일종의 향수병 증세가 도진다. 아직도 그 새파란 하늘아래 피아짤레 로마에서 산마르코 광장 가던 길, 산마르코 광장에서 집에 돌아가던 길, 세인트 엘레나 공원에 가는 길 등을 머릿 속으로 복기하곤 한다.
외솔관 뒤편으로 풀냄새 흙냄새를 잔뜩 맡을 수 있는 산책길 같은 데가 있다. 우연히 거길 올라 새소리 바람소리 흙밟히는 소리 등을 듣고 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저 너머로 흐릿하게 들리는 도시의 소음, 새소리, 다람쥐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원서를 소리내며 읽었는데
너무 행복하고 평화로워서 이 행복과 평화가 영원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주저앉기 전에 이것이 만족인지 안주인지 생각하곤 하는데, 너무 만족스러워서 일어날 필요가 없을 거 같았거든. 언제나 나는 하늘 높이 나는 그 날까지 활주로를 백번이고 천번이고 뛰는 사람이고 싶으니까.
친구랑 연희동에서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서 잠깐 공부를 하다가, 합정까지 걷고싶은 밤이라 계획보다 조금 일찍 나왔다. 학교 정문에서 홍대 걷고싶은거리, 그 거리에서 합정까지 나만의 루트가 있다.
밴드 미츠메를 좋아하는데, 새 앨범이 얼마전에 나왔길래 이걸 들으면서 그냥 걸었다.
맥아리없는 목소리와 기타리프가 매력적인 밴드인데, 그러면서도 기운빠지는 감성은 아니라서 더 좋다. 으쌰으쌰 부지런하게 낭만적인 시덥잖은 인간같은 감성이랄까. 왜 일찍자고 일찍일어나서 아침에 마당 쓸고 스트레칭하고 독서실 가서 으라차차 아이패드로 게임할 것 같은 느낌. 주말에는 약수터에서 약수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신촌에서 홍대 걷고싶은 거리까지 가는 그 길을 참 좋아한다. 타코몽 근처에 있는 밴드 합주실에서 합주했던 기억, 기타가방을 매고 큰 리트리버가 있는 카페에서 기타를 배웠던 일, 더운 여름,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거웠던 일 등. 재미난 추억들을 부지런히도 쌓았었다. 내 이십대 초반의 소중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
가는 길에 또박또박하게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온 복숭아 스파클링 와인 벨리니 7000”이라는 입간판이 있었다.
뭐가 제일 그립냐고 묻는다면 지평선이 그립다고 대답한다. 서울에서는 어디 옥상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는 한 사방이 건물로 막혀있는데, 가끔 그게 너무 답답하다.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 사람인데, 날씨가 좋을 때는 저 멀리 알프스도 아스라히 보인다. 그러니 그렇게 바깥이 궁금했겠지.
그나저나 벨리니 큰거 한 병에 비싸봐야 10유로인데 주류세가 쎄긴 쎈가보다.
합정은 글쎄. 아쉬운 마음이 좀 들었다.
홍대 뒤편에 이십대 초반의 기억이 있다면, 합정에는 고등학생 때 기억이 있다.
지금은 듣지않는 그때는 엄청 좋아했던 밴드의 공연을 고딩치고는 꽤 자주 보러갔었다. 공연 끝나고 친구랑 카페에서 커피 한잔. 뭐 그런 식의 그야말로 cherish한 기억이 있는 곳이다. 꼭 공연 보러가는 거 아니어도 내가 이 동네를 참 좋아했어서, 친구 만날 일 있으면 꼭 합정으로 가곤 했었다. 정신없는 홍대 메인거리를 벗어나 조금만 걸으면 금새 고즈넉한 공기와 아기자기한 소품가게들이 있고. 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달지.
완전히 바뀌었더라. 싸구려 가게들만 잔뜩… 괜찮은 가게들이 아직 몇 남아있는 것 같긴 했지만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자주 가던 카페도 문을 닫아 임대문의 프린트가 붙어있었고.
한편 재미난 표정으로 쏘다니는 사람도 많이 보였는데,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페이보릿 장소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무서운 점은, 변화는 변화일 뿐 순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색을 잃어버리면 다시 그 색을 찾기 힘들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라일락.
생각없이 길을 가다가도 어라?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만드는 그 향이 너무 좋다. 언젠가는 꼭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라일락 냄새를 맡고싶다.
라일락이 저물어갈 때 쯤 능소화가 피는데, 이별의 아쉬움을 새로운 인연으로 극복하는 느낌이랄지.
합정에 담장 너머로 흐드러지게 능소화 피는 집이 있는데, 조금 더 더워지면 합정에 다시 한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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